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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양복점이 나온 몇몇 매체의 기사 혹은 스크랩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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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양복점

서울시가 선정한 유서 깊은 종로·을지로 일대의 ‘오래 가게’ 39곳과, ‘서울 미래유산’ 목록을 보면 아직도 영업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오래 가게’는 오래된 가게가 오래 가길 바란다는 의미를 담았다.

(중략)

“이승만 대통령, 이병철 정주영 회장 등이 단골이던 해창양복점(1929년)”

오형규, 한국경제, september 2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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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양복점도, 이병철 회장도 ‘엄지척’한 해창의 양복기술

소공동에서 일명 ‘한 회장님’으로 통하는 그(‘해창’ 양복점 한창남 대표, 82세)는 국내 최고의 기술자도 많이 배출시키며 양복 좀 만든다는 사람이면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 등 당대를 주름 잡던 굵직한 인사들의 양복도 대부분 이분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중략) 

이병철 회장이 해창에서 맞춘 양복을 입고 자주 가던 일본의 양복점(일본 긴자 1번가에 있는 ‘이찌방 가야’)을 들렀더니 더 이상 자신의 샵에 오지 않아도 된다며 해창의 양복기술에 엄지를 척 들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이 회장은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양복을 해 입으셨다.

“스케치북 들고 떠나는 시간여행” 99-101쪽, 엄시연 글·그림, 팜파스 펴냄

이정윤, 독서신문, october 22n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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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출신 45년 양복匠人 이순신씨

가업(家業).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업이란 뜻이다.세업(世業)이라고도 한다.선대의 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후대 입장에선 도박일 수 있다.후대의 적성과 가업의 계승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할아버지,아버지의 거대한 그늘에 눌려 평생 자리를 찾지 못하고 ‘짝퉁’으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청출어람(靑出於藍).’그렇게 호락호락한 사자성어가 아니다. 

장인을 천하게 취급하는 분위기도 가업을 쉬 포기하게 하는 요소가 돼왔다.이런 탓에 유럽이나 일본처럼 수백년 전통의 장인 명가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다.더군다나 장인이 추구하는 옛것이 성장의 가파름과 무관할 때 장인 명가의 생존율은 급격히 떨어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를 물려 고집스럽게 양복을 지어온 명문대 출신 재단사가 있다.서울 소공동 해창양복점 사장 이순신(68)씨.대학생이 귀했던 1950년대 명문 서울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가 40여년 동안 한 길만 걸어온 사연은 무엇일까. 

75년의 궤적을 쌓은 해창양복점 

“저쪽 길 건너 해창양복점이오.” 

양복점이 운집한 소공동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을 물으면 재단사들은 입을 모아 해창을 가리킨다. 경쟁자들 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월의 누적이 해창을 믿게 만든다. 

지난해 12월 해창은 롯데호텔 본점 지하아케이드인 롯데 일번가에서 소공동 양복점거리로 되돌아왔다.롯데백화점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자 다시 옛 둥지를 찾은 셈이다.1929년 부산에서 문을 처음 연 해창양복점은 우리나라 수제 양복의 산실이다. 해창은 30년대는 서울 을지로4가에서,해방 전후에는 소공동,79년에는 롯데일번가로 자리를 바꿨지만 해창 특유의 브리티시 스타일 양복에는 변함이 없다.

해창의 창업자인 이씨의 아버지 이용수씨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제시대 당시 면서기로 근무를 하다 작은아버지가 있는 일본 고베로 향한다.

항구도시인 고베의 한 양복점에서 이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군복과 예복 등을 지으며 양복기술을 습득한다.그리고 23세에 귀국해 자신의 가게를 시작한다.

은행 취직 대신 가업을 잇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이씨는 주저없이 아버지의 양복점을 첫 직장으로 택했다.살림집과 붙어 있던 양복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재단사로 진로를 정했다.주위의 시선을 고려하면 쉽지 않았을텐데,이씨는 “은행에 다니는 것보다 옷을 만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서”라며 선택이유를 평범하게 밝혔다.의외로 아버지도 아들을 이해하고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이씨는 이미 고교 2학년때 수를 놓아 교복의 명찰을 만드는 방식을 처음 고안해낼 정도로 감각을 타고 났다.

당시 상과대학 학장이던 은사는 “상대생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면서 그의 장래를 걱정했지만 1년 뒤 제자를 다시 만났을 때는 잘 선택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동창들 가운데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친구들은 많아요.하지만 그들만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나도 내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가지고 성공한 셈입니다.”

적성을 찾은 이씨는 지난 1959년부터 고객의 몸치수를 재고 직접 재단을 했다.1970년에는 노동부 주관의 양복재단 1급 기능사 자격증도 거머쥐었다.옷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국내외 양복관련 단체에서도 맹활약했다.70∼80년대에는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전세계 20여개국 양복제작자들의 단체인 세계주문복업자연맹에서 회장으로 활동했다.

꼼꼼한 이병철,소탈한 정주영 

해창의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해창을 거쳐간 단골 명사들도 적지 않다.웬만큼 멋을 찾는 사람들은 옷의 맛을 찾아 해창의 문턱을 넘는다.

“제일모직에서 복지를 새로 만들면 인근 양복점에서 고 이병철씨의 옷을 시범으로 만들었습니다.지금은 고급 복지로 평가받지만 초창기에는 물에 적시면 사용한 실의 수축정도가 달라서 복지가 울었어요.” 

옷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 단골인 이병철씨와 정주영씨의 취향도 제각각이었다. 이병철씨는 권위적인 느낌의 옷을 좋아하며 옷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으며 정주영씨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양복을 즐겨 입었다. 해창의 단골손님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씨, 한국일보의 장기영씨 등이 있다. 

“젊은 시절 음식점 국일관에서 일했던 이기붕씨는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척 세심한 사람이었어요.옷을 가지고 가면 옷 상자까지 되돌려주고 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옷값은 즉시 지불했죠.”

풍채가 좋았던 한국일보 창업자인 장기영씨는 검정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다.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 숯다리미는 불의 강도 조절이 어려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옷에 흠을 냈던 일화도 있었다. 

“사람의 개성과 옷이 조화를 이뤄야” 

40여년 동안 쌓은 이씨의 옷 철학은 비싼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란다. 옷은 입는 사람의 개성과 품위,지위와 함께 조화를 이뤄야 제값을 한다고 말한다.

“옷은 사람에게 제2의 피부로 감정표현이 가능합니다.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품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인상이 좋게 보이고 호감도 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 맞춤 양복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해창은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1제품 생산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도 양복 한 벌을 짓는데 1주일여가 소요된다.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제대로 된 옷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산을 많이 하면 품질을 조정하기 힘들죠.수량이 많아지면 사람의 개성이나 취향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어요.” 

옷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은 역시 후학 양성으로 귀결된다.이씨의 아들도 불투명한 맞춤복의 미래 탓에 기성복 수출 쪽에서 일하고 있다.

“협회 차원에서 대학에 양복재단 관련 학과를 세우려고 하는데 이를 하겠다는 학교재단이 거의 없어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10년이나 소요되는 재단사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관련 학과라도 만들어야 맞춤양복의 명맥을 잇지 않을까요.”

프로필  

▲1936년 1월 8일 서울 출생 

▲1955년 2월 서울고등학교 졸업 

▲1959년 2월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59년∼현재 해창양복점 경영 

▲1966년∼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한국대표 

▲1976∼1986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 

▲1984년 9월 제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양복심사장

▲1984년∼현재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1991∼1999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부회장 

▲1997∼2003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1999∼2003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회장 

▲2003∼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명예회장 

이유종, 서울신문, may 24th,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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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rvival of the fittest

Custom suitmaking remains an art, while number of buyers declines

"A suit gives the wearer not only the right shape but also an attitude that is distinctive and elegant," says the tailor Lee Soon-shin. 

Mr. Lee is dressed in a navy-blue suit with an orange-striped pocket square and a blue-and yellow necktie. Tall, lean and with graying hair, Mr. Lee exudes the gentle aura of a wise and successful chief executive.

His success as a tailor is known beyond Korea, in fact. Besides having held important posts in custom tailor associations in Korea, Mr. Lee has been the the president of a worldwide association of tailors for the past three years, the World Federation of Master Tailors. His shop is a humble one located in a downtown shopping center, the Lotte Hotel Arcade. It is crowded with English signs, but has another sign that says "Haechang" in somber Chinese characters and the year 1929. That was the year Mr. Lee's father started the business, with a shop in Busan.

Haechang, which means "to prosper like the sea," is one of the oldest, most prestigious custom tailors in Korea, and its past clientele list includes the former presidents Syngman Rhee, Yun Bo-sun and other high-profile political figures from the 1950s and 1960s. Foreign dignitaries knew of Haechang's reputation and made orders there; they favored suits of a rare fabric made from a special type of Australian wool, which cost 10 million won ($8,500).

Mr. Lee was born the second son of Lee Yong-su, a custom tailor who learned his trade in Kobe, Japan, near an American naval base. When the young Lee was in his early teens, his family moved from Busan to Seoul, and his father took his business to a shop in Sanlim-dong, near Euljiro, where many Korean tailors worked. At the time, many shops in that Myeongdong area were owned by Japanese. Looking back, Lee says, "Korean tailors owe a debt to Japanese tailors because the Japanese first adopted Western tailoring; but Korean styles became distinctively different, because Koreans are long-limbed and more style-oriented, while Japanese pay more attention to function."

Of his father's three sons, Mr. Lee was the only one who was strongly interested in tailoring and took it up as a profession. When he graduated from Seoul National University with a degree in business, one of his professors, a long-time client of Haechang, said a smart young man should not pursue tailoring because it was a "low-class job." But Mr. Lee was determined. Meanwhile, one of his brothers became a lawyer, the other a banker. 

"A tailor was a 3D -- degrading, dirty and difficult -- job which young elites shunned," Mr. Lee explains. "They didn't make much money." As an educated tailor, Mr. Lee created a research forum for tradesmen and merchants. In the late '60s he represented Korea at an international convention of master tailors, and the stylish Mr. Lee even modeled the clothes. 

He recalls that his father's suits were in demand before the family escaped to Busan during the Korean War. When the family came back to Seoul, his father set up at another location, near the Chosun Hotel in downtown Seoul. At the time, Korea's leaders -- politicians, bankers, intellectuals -- favored sharp suits, and the business thrived. 

But Korea's peacetime history wasn't always friendly to custom tailors. In the early '70s, President Park Chung Hee urged Koreans to wear cheap suits to promote frugality. Men were supposed to wear "People's clothes," consisting of a a simple suit without a tie. Then there was the oil shock in the mid-1970s, which slowed sales. And the rise in ready-made suits toward the end of the 1980s hurt the tailor industry even more. 

Today Mr. Lee is worried about the lack of young Korean tailors. "No young men nowadays want to learn a skill that takes 10 years to master," he says. "The shortage of technicians is prevalent worldwide." The Ministry of Labor recently supported a plan to cultivate tailors, but it collapsed. Seoul has only one institute that provides training for tailors.

Since 1969, the number of tailors, 3,000, registered in the Custom Tailors and Designers Association of Korea hasn't decreased, although the number of buyers shrank. Business at Haechang has been slow since it moved into its latest location. "Selling 200 suits per month used to be normal for a small business, but now a tailor with a good name sells fewer than 200 per year," Mr. Lee says. He adds that tailors should compete not in price ?destructive for all -- but technique. The good news is that for the past few years more young Koreans are buying custom suits. Mr. Lee explains, "Wearing a custom tailored suit is not about having a lot of money, but knowing the real value of a suit; the future of tailors faces a competition between a work of art for the specific few and a product for the masses."

International meetings to share techniques, information and culture and build links will help repopularize the concept of custom tailoring, he says. 

Does Mr. Lee have any pet peeves? "Korean men wearing short-sleeve shirts with a suit. A classic gentleman would never do such a thing."


When you find a good shop, wear it out


Bahng Kyu-ho has been ordering suits from the Haechang store for the past 33 years. As a young man, Mr. Bahng, now in his mid-50s, favored Haechang's classic style suits. Today, as he comes in for a fitting, he is wearing a Ferre's sport jacket over gray slacks. His belt and wallet are both alligator skin. Both the tortoise shell glasses and the black pen tucked in his shirt pocket are Mont Blanc. His favorite brand names are all European and famous for their elegant style, such as Ermenegildo Zegna, Cerruti and Christian Dior. He moved to Hong Kong decades ago, but every time he comes back to Seoul, he orders a suit or two from Haechang. He has tried suits made by Chinese or Indonesian tailors. "But nothing beats Korean tailors' works," he says, while trying on a half-finished jacket.

What makes a Haechang suit worth a price tag of some 1.5 million won ($1,250)? "First of all, the stitches are sturdy and the shape is sleek," Mr. Bahng says. "The suit is very comfortable, and I get compliments when I wear a suit from Haechang." He is clearly pleased with the shape of the navy blue suit he has ordered, as a tailor, Han Chang-nam, and an assistant, Bae Jong-nam, check on the fit.

Mr. Han joined Haechang in 1985, Mr. Bae in 1994. With Lee Soon-shin, they consider themselves a team. Already familiar with Mr. Bahng's shape, they can skip some of the fitting.

Both Mr. Han and Mr. Bae say Mr. Bahng has a discerning eye for fine clothes and knows how to talk with tailors. "To satisfy such a sophisticated client like Mr. Bahng, integrity and discipline are required," Mr. Han said. In return, Mr. Bahng continues to appreciate the quality suits he gets from one of Korea's most dedicated tail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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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ēs cho, korea joongang daily, august 16th,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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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선 유교의 사농공상이 남아있어 직업의 귀천을 가립니다]

해창양복점 주인인 이순신(58, 상대졸) 동문의 말이다. 처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복점을 하겠다고 했을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울대까지 나와서…]라며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말했다.

— 서울대학교동창회보, august 1st,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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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복 만들기 3대 60년 해창양복점, 단골이 아들 데려올 때 가장 뿌듯”

맵시나는 신사를 만드는데 바쳐온 60여년, 서울 소공동 ‘해창양복점’은 남자들의 옷맵시를 위해 1929년 이래 아들에서 아들로 3대를 이어오며 신사복을 만들고 있다.

‘해창’은 열여섯살에 일본에 가서 기술을 익혀온 1대 이용수옹(90), 서울대상대를 나오고도 ‘쟁이’의 길을 간 2대 이순신씨를 거쳐 가업을 잇고자 대학을 중퇴하고 일을 거들다 복장기술을 배우러 유학중인 3대 이정호씨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일본에 건너간 아버지는 초기에 양복점 주인이 재단기술을 잘 안가르쳐줘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을 익히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고 해요. 어느날 손님이 맡기고 간 양복을 주인 몰래 수선해 놓은 것이 주인맘에들어 다른 일본인 직공들보다 빨리 재단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2대 이순신씨의 말이다.

순신씨는 대학졸업 후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자 스승이 가게에 찾아와 “내 제자를 양복쟁이로 만들 수 없다”며 만류했던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버지와 일하면서도 남들이 ‘양복쟁이’라 무시할 때는 자신의 선택에 회의가 들기도 했다는 그는 60년대 중반 해외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외국에선 재단사가 의사만큼 대접받는 것을 보곤 언젠가는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고 한다. 그는 “입을때마다 애착이 느껴지는 옷을 만들려 노력한 덕분에 꾸준히 찾는 단골만도 2백여명에 이른다”며 이곳에서 옷해 입던 사람이 아들의 예복을 주문할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말한다.

— 동아일보, february 16th,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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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패션의 메카"자부

조선호텔 쪽 소공로에서 출발, 롯데백화점올 거쳐 광교에 이르는 5백여m 거리에는 모두 1백17군데의크고 작은 고급 양복점들이밀집해 있다. 한국남성패션의 1번지. 조흥은행 본점 쪽 광교 일대에 15곳, 롯데백화점·호텔의 지하 및 2층에 19곳, 플라자호텔 지하를 비롯한 소공로 일대에 23곳이 몰려있으며 반도조선아케이드 건물안에만 무러 50곳의 양복점이 들어서있다. 백17곳 밀집…부업 60년 된곳도|이승만·윤보선등 전현직대통령 모두 단골|기성복 대중화에 "최고급품 전문"으로 맞서 1889년 일본인이 현 광화문우체국 옆자리에 「하마다양복점」 을 연 것이 이 거리의 효시. 고종등 황실의 양복을 맞춰주기 시작하면서 양복점들이 늘기 시작했고 그이후해방될 때까지 일본인에게양복기술을 배운 한국인들은 종로일대에, 일본인 양복점은 일본인이 많이 살던남산과 가까운 충무로 일대에 각각 자리잡았다. 해방으로 일본인상점들은철수하고 6·25를 거치면서종로일대의 양복점 건물이파괴돼 그나마 건물상태가좋았던 광교일대로 양복점들이 대거 몰렸다. 지금은 재개발과 도로확장공사로 15곳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50,60년대만해도 40여곳이 밀집해 있었으며 한영·미조사·미림등의 유명양복점들은 이때 큰명성을 떨쳤다. 이후 각종 공사로 건물이 없어진 양복점들이 반도조선아케이드내로 이전하고 소공로에 조선·플라자호텔이 들어서면서 소공로 일대에 외국인들을 상대로한 양복점들이 늘어났다. 7O년대만 해도 환율탓으로 양복값이 국제시세에 비해 크게 싼 편이어서 외국인들을 상대로한 영업이 짭짤했고 특히 일본사람들은 한번에 대여섯벌씩 맞춰가곤 했다는 것이 이곳사람들의 「황금기」 에 대한기억이다. 『요즘은 그런 외국사람들도 없고 국내인들도 기성복으로 몰리는 형편이라 관계· 재계의 상류계층 인사들만이 주요 단골이죠.』


소공동 해창양복점의 박익휘씨(50)는 이승만전대통령· 장면박사· 윤보선전대통령· 최규하전대통령등이 모두「해창팬」이었다고 전한다.

(중략)


자식들이 좋은 직장을 버리고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는 양복점도 이곳 거리의 자랑.
창업 60년을 맞은 해창양복점의 경우 이용수씨(방)의 두아들 일신씨(62·서울대공대졸업·소공동본점) 와 순신씨(56· 서울대상대졸업·롯데호텔분점)가 뒤를이었고 손자 정제씨(37) 도 지난해 신사동에 분점을 개설, 「장인3대」를 이루고 있다.

(후략)

이효준, 중앙일보, january 12th,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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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11th march,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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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5th november,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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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august 3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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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august 31,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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